[홍헌영 칼럼] 자치분권이란 무엇인가? (1)
상태바
[홍헌영 칼럼] 자치분권이란 무엇인가? (1)
  • 시흥시민신문
  • 승인 2020.01.16 13: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분리주의에 맞서: 독립에서 연합으로
홍헌영 시의원
홍헌영 시의원

구별된 사람들의 공동체

“정치는 사람들을 연합하는 기술이다.”
위의 어록을 남긴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요하네스 알투지우스(Johannes Althusius, 1557~1638)가 시평의원으로서 독일의 엠덴 시(市) 독립을 위해 싸우고, 이후 죽을 때까지 시장을 지내며 정립한 이론이 현대 연방제와 자치분권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그에 따르면 가장 발전된 사회에는 세 종류의 연합이 있다. 1)결혼, 가정으로 맺어진 사적-자연적 연합, 2)친인척, 이웃들과 형성하는 사적-자발적 연합, 3)지역 혹은 세계의 공적-정치적 연합. 공동체는 이 연합의 자발적인 공통의 약속(합의헌법) 안에서 형성된다. 중요한 것은 첫째로 갈수록 정치사회의 기반이자 더 먼저이고 중요하며, 상위에 있다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우선이고, 그 공동체가 감당치 못하는 것을 보충하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 계약 안에서 공적-정치적 연합이 탄생한다. 주민자치의 핵심 개념이자 현대 헌법의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보충성의 원리’는 이 논리를 명시화 한 것이다. 

특이한 점은 알투지우스가 이에 가장 적합한 역사적 모델을 고대 그리스가 아닌 고대 이스라엘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1)사라와 아브라함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2)야곱의 열두 자손을 통해 부족사회를 이루고, 이후 열두 지파의 소도시 연합을 이루었다. 3)계약으로 왕을 세워 지파를 보존한 하나의 국가를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자발적 연합으로부터 국가를 이룬 가장 이상적인 사례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고대 그리스의 ‘시민’은 계급적 개념이고, 노예를 소유한 특권층이었다. 실제로 노예제 카스트를 옹호한 미국 남부의 귀족들은 자신들을 북부 청교도와 다른 그리스-로마 공화정의 적통이라 여겼다. 이에 비해 알투지우스의 공화정은 보증자 ‘신’ 앞에 합의계약을 통한 모든 개인과 사적 연합의 주권을 보장한다. 어느 개인(연합)도 다른 개인(연합)의 주권을 침범하여 지배할 수 없으며, 명시적으로 위임된 것 이상의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운 인간’에 대한 종교로서의 프랑스 혁명과는 다른 정신적 기원을 갖는다. 참된 공화정은 무제한적인 인간 해방과 이성 숭배, 끝없는 내전(stasis)이 아닌 초월자의 주권으로 모든 권한을 제한하는 절제된 공화정이다. 

분리주의에 맞서: 독립에서 연합으로

그러나 이 말이 맞는가? (청년) 헤겔은 고대 이스라엘이야말로 ‘시민’과는 가장 거리가 먼 공동체라고 보았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평등하지만 모든 것이 신에게 양도된 것으로서 어느 것도 소유할 수 없는 평등, 고대 그리스와 비교할 때 어떠한 시민권, 입법권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은밀한 사제권력의 전제정이다. 

비판자들은 이들이야말로 참된 연합과는 거리가 먼, 분리주의의 울타리 안에서 이방인을 배제하고 그들만의 정의를 수호한 열광주의자였다고 말한다. 실제로 알투지우스는 연방제 이론을 자신의 신앙과 이념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적용했고, 불신을 보인 자들에게는 출판과 모임을 금할 뿐 아니라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할 것을 주장했다. 

사적 연합의 주권과 권력의 분권, 연방제 질서에 대한 논리가 더 큰 선민의식과 분리주의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사례들은 많다. 그렇지 않으려면 공적 연합과 국가의 존립이 더 작은 연합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되, 보편적 관심에 의해 지방주의를 고차원적으로 회복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자치분권은 또 다시 분리주의의 타락에 빠지거나, ‘지방’이라는 구체적 현실을 무시한 추상적 보편주의, 즉 보댕의 절대국가론이 다시금 승리하게 된다.

지방적인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보편적 관심은 언제나 의심되는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지방주의 역시 자신들의 지방만이 특별하다고 믿어버림으로써 부정된다. 다음에 자세히 다루게 될 참된 지방주의는 지방의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그 어디든 특별한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정치가 정말로 “사람들을 연합하는 기술”이라면, 정치는 지방적 사실을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려는, 참된 지방주의를 회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