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두 얼굴 : 요시다 쇼인과 안중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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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두 얼굴 : 요시다 쇼인과 안중근(중)
  • 김해정 기자
  • 승인 2019.10.04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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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청년입니까?”
홍헌영 시의원
홍헌영 시의원

 

계승되는 의지, 요시다 쇼인과 안중근

앞서 일본 민족주의의 원형,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과 “동양평화론”을 집필한 안중근(1879~1910)의 생애와 사상을 비교해서 다루었다.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민족주의만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존재하지만, 천황과 선민사상을 기초로 한 일본서기, 고사기에 기초하여 국학운동을 이끌고 이후 후예들이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여 지금껏 집권해온 과정을 보면 요시다 쇼인은 현재에도 일본 민족주의의 심장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반면 일반적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만 알려진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 집필을 통해 동아시아 평화체제, 더 나아가 동아시아산(産) 보편주의를 정립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안중근의 구상을 5가지로 정리하면 이렇다. (1) 뤼순을 중립지대로 한 한중일 3국의 협력기구 설치, (2) 한중일 3국의 공동은행을 설립 및 공용화폐 발행, (3) 한중일 3국의 연합군을 창설하여 제국주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 (4) 일본의 주도로 동아시아 경제개발 착수, (5) 로마 교황의 중재 아래 상호주권을 존중한 항구적 평화체제 마련.

역사는 혼(魂), 어떤 혼을 좇을 것인가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역사는 혼(魂)이라고 했다. 요시다 쇼인은 30세에 죽었고, 안중근은 32세에 죽었지만 그 짧은 시기의 열정이 역사가 되어 혼으로 남았다. 경제력과 군사력은 날로 강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외부 열강에 의해 전선이 분할되어 반목하는 동아시아의 현주소를 볼 때, 지금의 청년은 어떤 혼을 가지고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바라보아야 할까?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개화에 성공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높은 평가가 많음은 사실이다. “역사의 연구”로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외부 문명의 도전과 응전을 다루는 대목에서 외부 문명에 배타적으로 항전하는 방식을 옛 이스라엘 역사에 빗대어 젤롯주의(zealotism)라 하고, 외세와 타협하여 권한을 보장받아 실리적인 것을 얻어내려는 방식을 헤롯주의(herodism)라 칭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로 보면 개화기의 위정척사와 급진개화파 내지 친일파가 그 사례가 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토인비가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하여 “헤롯주의적인 방식으로 젤롯주의를 달성하려는 시도”라고 평가한 것이다. 토인비는 현재를 무시하고 과거만 회복시키려는 젤롯주의나, 혐오스러운 현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내포한 채 미래로 뛰어드는 가장된 헤롯주의 모두 “인간 영혼 속의 분열”을 나타내는 것이라 말했다. 개화로 경제적인 발전은 이루었으나 역성혁명이 없는 천황의 신성성으로 국가통합을 이룬 메이지 유신은 오히려 분권과 민주화 측면에서는 역행한 개혁이었다. 패전 이후 미국에 일방적 주도로 만들어진, 너무나 미국적이고 민주적인 ‘평화헌법’ 아래 끊임없이 개헌을 시도하는 내부의 노력 또한 지금도 볼 수 있는 분열의 표징일 것이다.

개화기에 동양의 정신을 지키며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자고 제안한 동도서기(東道西器), 구본신참의 자세 또한 한계가 있다. 얼핏 보기에 균형 잡힌 것으로 보이는 동도서기론의 이면에는 서양의 문명을 단순히 기술로 보고 동양의 정신만을 성숙하고 우월한 것으로 보는 오만이 있거나, 문명 자체를 정신과 기술로 나누어 접근할 수 있다는 소박한 기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보다는 자신과 타자의 특수성을 인정하되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안중근이 생전에 남긴 “동양평화론”에서 이색적인 것은 한중일 3국에 존재하던 당시 황제에 대한 대관식을 로마교황을 통해 하자는 제안이었다. 일찍이 황제 대관식을 가톨릭교회가 수행하던 서구의 전통을 따름으로써 동아시아 각국의 주권을 서구 세계 안에서도 승인받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중근은 기독교 문명에 대한 사대주의자인가? 안중근은 천황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앞선 일본의 주도로 동아시아권을 개발하자고도 했다. 그러면 안중근은 친일파에 근왕주의자인가? 그렇지 않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기 때문에 단순히 민족주의자이거나 국수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안중근이 주목한 것은 동아시아에 정착되어야 할 보편적이고 정의로운 체제였다.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동아시아 주권을 지키되 보편적인 정당성을 인정받을 평화체제를 상상한 것이었다. 적어도 “문필에 의해 세워진”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수행해야 할 책임이라 인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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