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두 얼굴 : 요시다 쇼인과 안중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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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두 얼굴 : 요시다 쇼인과 안중근 (상)
  • 김해정
  • 승인 2019.09.2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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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청년입니까?”
홍헌영 시흥시의원
홍헌영 시흥시의원

 

요시다 쇼인의 혼(魂)

“조선은 옛날에 일본에 속해 있지만 지금은 거들먹거리고 있다.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습격할 것이니 장래에 예측할 수 없는 근심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합병해야 하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각자였다.”

메이지 유신과 군국주의 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집권 세력에게 ‘일본의 혼(大和魂)’이자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는 요시다 쇼인(1830~1859)의 어록이다. 놀라운 것은 막부의 반역 세력으로 처형된 때가 30세이니, 조슈 번(현 야마구치 현)에서 막부 타도를 일념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모이게 한 국혼 부흥 운동이 20대 청년 시기에 이루어진 셈이다.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고 함께한 인물 다수가 내각으로 들어서면서 쇼인의 일본몽(日本夢)은 점차 부풀려지고 실현되었다. 일본은 신이 내린 신성한 나라이며, 우월한 일본이 천황을 중심으로 아시아를 이끌어야 하며, 서양에게 입은 손해는 조선과 만주의 토지로 보상받아야 하며, 다케시마(독도) 점령이 첫 출발이 되어야 하고, 이후 러시아, 대만, 필리핀을 손에 넣어 진취적 기상을 보여야 한다는 등 국가 중흥을 위해 품었던 한 청년의 패기어린 몽상이 실제 한일병합과 태평양 전쟁의 역사로 나타난 것이다.

쇼인의 사숙(“쇼카손주쿠”)에서 배운 인물 중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초대일본총리, 초대한국통감)는 쇼인이 강조한 맹자의 ‘지성(至誠)’을 좌우명으로 삼고,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로 만든 한일신협약(1907,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쇼인의 묘지를 찾아가 그 사실을 보고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현 총리인 아베 신조 역시 동일한 ‘지성’을 좌우명으로 삼고, 총리로 당선되고 나서 쇼인의 묘지를 찾아가 참배하며 “쇼인 선생의 뜻을 충실하게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역사를 계승한다고 생각한 요시다 쇼인, 이토 히로부미와 메이지 유신 세력, 아베 신조를 포함한 집권 세력의 다수가 조슈(야마구치) 출신임을 보면 “조슈에서 일본을 떠받치는 기둥, 훌륭한 인물들이 나올 것”이라 말한 쇼인의 말은 그들이 보기에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안중근의 혼(魂)

한편 초대통감에서 물러나 일본으로 복귀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후 한일합병을 위해 러시아 외무장관과의 회담이 예정된 만주 하얼빈을 방문했다가, 하얼빈역에 잠복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1879~1910)의 권총 저격으로 사망한다.

의거 후 안중근의 생각은 대다수가 일본인인 500여 명의 방청자가 지켜보는 공개재판장에서 드러난다. 한국은 러시아의 위협을 두고 일왕이 밝힌 “동양의 평화”에 공감했으며, 한국 역시 동아시아의 일원으로서 이에 동참하고자 했다. 그러나 을사, 정미조약은 그러한 취지를 범했으며 이런 일을 벌인 이토 일당은 한국 국민뿐 아니라 천황마저 배신한 처사라는 것이다.

안중근은 일본을 비판했지만 일본의 정체성인 천황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상호존중과 책임의 자세로 평화체제가 구축되길 바랐다. 그는 옥중에서 자신이 생각한 진정한 “동양평화론”을 5장으로 구상하여 집필하려 했으나, 40여 일만에 처형이 집행됨에 따라 서론격인 2장만 집필하고 형장으로 향해야 했다.

안중근이 구상한 동양평화체제는 만주의 뤼순을 중립지대로 하여 한중일 3국이 참여하는 동양평화회의를 두고, 공동으로 동아시아 공동체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앞선 일본이 주도적으로 개발하되 평화의 보장으로 공동관리하는 군항과 은행을 두고 ‘공용화폐’까지 발행할 것을 제안했으니, 이권보장과 함께 현 유럽의 경제연합과 집단안보에 준하는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세 나라의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는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이 높아지도록 지도한다” 다시 말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에 대하여 단순한 타도가 아닌 동양평화 선도자로서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한 것이었다.

당시 국제정세와 힘이 없던 한반도 현실을 고려하면 그러한 제안이 실현되기 어려웠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히려 제국주의가 창궐하는 시기에 그러한 과감한 구상을 한 것은 단순한 국수주의보다 더 용기 있고 창조적인 시도였다. 얼굴도 몰랐던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처단한 것만큼이나 패기 있는 평화의 시도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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