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눈물만
상태바
한없이 눈물만
  • 조민환
  • 승인 2017.08.21 14: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누가 있어 눈물을 훔쳐줄까!!

밤새 그토록 찢어발기듯 한 바람과 사나운 비가 잦아들었다.

엄청난 7월말의 빗속에서도 스스로를 자랑하며 내내 내리쬐던 햇볕의 강열함이 다소 사라지고 사늘한 계절의 모습을 모이더니 어젯밤엔 내내 비와 바람이 창을 할퀴었다.

다섯 시, 구름이 물 흐르듯 산자락을 넘나 들뿐 비는 모습을 감췄다. 간간히 툭툭 소름만 던질 뿐. 8월 15일 광복절이다.

시흥시에는 어떤 행사도 없었다.

이것이 말이 돼? 시청당직실과 지인인 시의원들에게 “오늘 행사 있어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없어요! 없네! 답은 짧았다.

지역사회 활동가라고 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지인에게도 “행사 없어요?”라고 카톡을 날렸다. 답은 받아보지 못했다.

알고지내는 형의 권유로 조기매운탕으로 지지리 한 하루를 위한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하루를 잊었다.

9시 2분 “광복72주년 광복절입니다. 조국독립을 위해 옥고를 치루고 헌신하신 시흥출신 윤동욱, 권희, 장수산 세분의 선열묘소와 지난해 조성된 위안부소녀상을 돌아보고 광복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고자 작은 기행을 하려합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 함께해도 좋겠습니다”는 안내 문자가 왔다.

덧붙여 “일시 : 8월15일(화) 오후2시, 모이는 장소 : 시흥시청에서 출발하려고 합니다. 이동은 승용차로 하려합니다” 시흥시사회복지사협의회 장대석 사무국장의 알림이다.

내용은 살펴봤으나, 역시 잊었다.

10시 27분 ‘뭐야?’ 문재인 대통령의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가 많은 여운을 남기고 있는 시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뭔 일이래?” 폭우는 20여 분간 쏟아졌다! ‘혹시 7월의 악몽이?’ 시청재난상황실에 전화를 넣었다. “아직 도로 침수 외 특별한 사항은 없고, 신천동저지대 1가구 침수 신고가 있어 대책반 보내서 해결중입니다!” 그리고 바로 비가 다시 잦아들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살펴보다 나니 낮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잊었던 장 사무국장의 작은 기행 소식이 머리를 스쳤다. 과연 장 사무국장의 제안에 몇 명이나 답을 했을까. 12시 5분 문자를 넣었다.

“몇 분쯤 참여의사를 밝혔나요?”

“김영철 의장이 제안한 것인데, 급히 알리다보니 아직 신청자는 없습니다. 더구나 비도 많이 내려서 더 그런 듯합니다”

“네~! 기행은 하실 건가요?”, “비가 아주 심하지 않으면 진행하려 합니다!”, “의장은 간데요?”, “네!”, “저도 동참 하겠습니다”

“2시에 시청주차장에서 뵙겠습니다”는 답이 왔다.

2시 6분 김영철 의장과 장대석 사무국장이 합승한 자동차가 시청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이 차로 갑니다”, “다른 분들은 안계시나요?”

시청을 출발해 약 10분 산현동 산25-3번지,  은밀한 추억이 깃든 곳과 지근거리인 물왕저수지 인근 나지막한 야산이다.

시흥의 애국지사 ‘윤동욱’ 지묘.

묘지 앞 도로, ‘시흥의 애국지사 윤동욱’ 표지는 「윤동욱(尹東旭, 1891 ~ 1968)의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학은(鶴隱)으로 1891년(고종 28)에 이곳 산현리에서 출생했다. 29세가 되던 1919년 3월 30일, 1000여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전개되던 시흥군 수암면 비석거리의 3·1 만세 운동에 참여해 시위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그는 경찰 주재소, 공립보통학교, 면사무소 등이 있었던 읍내로 행진하며,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공립보통학교 앞에 이르러 시위를 진압하던 조선인 순사 임건호(任建鎬)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니 만세를 부르라”고 큰소리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또한 헌병대의 강제 진압으로 인해 격분한 시위대가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려하자, “독립이 되고나면 이는 모두 우리의 국유재산이 되니 털끝만큼이라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하며 이를 진정시켰다.」는 내용을 담고 서있다.

표지를 읽은 김영철 의장과 장대석 사무국장이 우산으로 비를 가리며 잡초로 우거진 이슬 가득한 비탈길을 올랐다.

산입, ‘항일 애국지사 학은 윤동욱 선생 기념비’ 세운사람들 란에는 조원희 시의원의 이름도 올라있었다.

윤동욱 지사의 묘지는, 그나마 후손들이 돌 본 듯은 해 보였다.

애국의 은혜에 감사의 묵념을 올리고 돌아서 내려오다 보니 올라 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수령이 수십 년은 된 듯한 목련나무가 주먹만큼 커다란 씨앗을 자랑했다.

차를 돌려 장현동 417번지로 길을 잡았다. 권희 지사의 묘소를 참배할 참이다.

김영철 의장은 “권희 선생은 국립묘지로 이장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표지판이나 있을지 모르겠네”하고 혼자 말처럼 툭 던졌다.

“무슨 말이세요?”, “권희 선생은 장현지구 개발지역 내에 묘소가 있어서 현충사로 묘지를 이장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표지판은 있을텐데, 일단 가봅시다”

장곡동 경찰서를 지나 군자동에서 차를 유턴시켜 돌아와, 가든 ‘황고개 집’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켜고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개발지와 산의 샛길을 걸었다.

거리는 170m, 40m를 앞두고 길이 끊겼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지점 쯤 돼 보이는 곳은 인도교 앞 방향이었다.

‘저 차량이 서있는 곳?’ 개발을 위해 일대가 모두 파헤쳐져 흔적이 없다.

“LH공사에 문의해봅시다. 길도 없고 표지판이 보이지 않네요!” 김영철 의장이 발길을 돌리자고 했다. 길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 장대석 사무국장도 수긍했다.

아쉽지만 현충사로 이장했다는 의장의 직전 말이 다소나마 위로가 됐다.

“마유로로 길을 잡읍시다” 우산을 접어들고 차에 오른 김영철 의장이 길을 안내 했다.

경찰서를 지나 연성2교차로에서 좌회전을 받아 갯골생태공원 입구를 지나 쳤다.

동서로로 올라선 차는 장곡교차로에서 좌회전을 받아 군자로를 지나 고개를 올랐다. 차는  정왕공설묘지·뒷방울저수지 방향 샛길로 우회전하더니 기모교 아래를 이용해 유턴형식의 길을 잡아, 돌아가는 오르막을 차고 길가에 세워졌다.

주차한 차 옆에 ‘장수산 선생묘 60m’라고 표기된 스테인리스 표지판과 5m 정도의 앞쪽에 ‘독립운동가 장수산 선생묘 입구’지석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영철 의장이 스테인리스 표지판을 바라보면서 “후손들의 요구로 시에서 제작해 세웠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우거진 잡초들 사이로 묘소를 향한 오솔길이 있었다. 걸음을 내딛자 또다시, 툭툭거리며 굵어진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렸다.

장수산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길을 따르다 보니 배롱나무꽃이 무거운 듯 빗물을 머금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방문객을 향해 인사를 하는 듯, 아름답다.

‘거모동 산 151번지’ 잡초 길을 헤치고 한참을 올라가자 3기의 묘소가 함께 자리잡아있고 가운데 묘지가 장수산 선생의 묘소로 보였다.

아무래도 비표의 내용으로 봐선 선생부부가 합장된 듯 했다.

묘비명은 ‘애국지사덕수장공순한(수산)지묘  배 김해김씨수옥 부좌(愛國志士 德水張公淳翰(壽山)之墓, 配 金海金氏壽玉 左)’로 새겨져있다.

비문은 「애국지사 매암 덕수장공 묘비.

초위(첫이름)는 수산이시나 순한으로 바꾸시었다. 자는 중옥 호는 매암이시다. 평생 농부이신 주진과 언양김씨 주찬을 어버이로 1899년 시흥군 군자면 장곡리에서 나시었다.

덕수장씨  시조공 순용의 23세, 문과장원 류정공 옥의 16세, 문과장원 서촌공 운익의 13세, 인조반정 정사공신 덕창군 신의 12세, 진사공 경의 6세손이시다. 수암면 양상리 외조께 한학을 배우시고 군자초등학교 다니시었다.

20세에 모친을 여의시고 21세에 권공 희와 더불어 독립만세운동 주도하시어 10개월의 옥고를 치루시었으며, 23세에 혼인을 하시었다. 30세에 시흥 연성음사 전국한시대회의 5등에 드시었다. 자손의 진학을 위해 창씨 개명하시었으나, 일제하 보안사범 혐의로 온전한 가정하나 꾸미지 못하신 채 방랑에 드시었다. 44세에 김해김씨 수옥을 만나시고 다시 고향에서 새 가정 이루시었다. 광복과 함께 후사를 얻으시고 이듬해에 부친 여의시었다.

후손 위해 장곡초등학교 앞장서 세우시었으며, 자식의 교육위해 인천에서 어렵게 지내시었다. 낯선 안동에 이거하시곤 교수로 봉직하시는 자식에 남다른 자부심 지니시었다.

외독자의 독일유학 눈물로 허락하신 뒤 자손과 헤어지는 깊은 외로움 감추시었다. 출국 앞둔 1981년 5월15일 83세에 뜻 아니 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시어 고향 어버이 유택 곁에 상여로 모시어졌다. 1990년 대한민국건국헌장 애국장(훈장증 464호) 추서되어 나라 사랑 열정이 늦게야 표창되었다. 떳떳한 조상으로 자손긍지 높이시었으니 저승에서나마 기꺼우시리라, 유래와 공의 유택은 개발로 말미암아 1996년 9월 햇볕 바른 가족묘소원 남향판에 옮겨 나란히 꾸며졌다. 국립묘지 사양하고 고향땅을 택하였다.

일상에 자주 유학을 논하시고 술과 담배, 생선회와 개장국 무척이나 즐기시었다. 몸에 배이신 근검절약 추원보본에 극진하신 정성 친척친지와 돈독하신 우애는 이 세상 어느 누구 따를 이 없으시었다.

배위는 김갑배와 김을배를 어버이로 1921년 부여군 석성면 석성리에서 나시었다. 부군을 만나시어 타고나신 부지런함으로 아들 하나 딸 둘 키우시었다. 땅 불리시는 재미에 ‘흰 쌀밥 싫도록 잡수고 싶다’하시던 시아버님 소원 한번 제대로 못 풀어드린 것 평생의 한이시라고, 이태리 의사의 도움으로 새 삶 찾으시었다며 내내 그 나라에 고마워하시고 장곡초등학교 지을 때 닳은 손톱 피 나도록 보리쌀 으깨어 일꾼 뒷바라지하시었다.

독일 퀼튼 대성당에 많은 상념 남기시고 데레사란 이름으로 천주교에 귀의하시었다.

보훈연금 받자 오시곤 “한평생 고생시키던 영감 덕 이제야 보신다”며 공허한 웃음을 짓기도 하시었다. 빨간빛과 장미꽃 좋아하시는 화사한 마음씨 지니시었다. 뼈깍는 아픈 암에 못 견뎌 하시면서 병원보다 자손 목소리에 도다운 정 보듬으시다. 1996년 10월 31일 76세로 운명하시었다.

상여소리 달고소리에 부군 곁에 묻히시었다. 묘원 가꾼 지 어언 한 해 고애자(아들)가 어버이 행적 더듬어 비문지어 안동철이 글씨 쓰고, 하선 박충자가 묘표 쓰고 대산석촌 이석근이 글씨 새기어 이 비 세운다. 1997년(단기 4330)년 10월」로 맺었다.

순한으로 개명한 장수산 지사와 부인 수옥 여사의의 생전 기록이 세세하고 꾸밈없이 기록돼 있어 읽는 이들에게 즐거움도 선사했다.

비문을 읽는 내내 웃음으로 가득하던 것도 잠시 묘소 앞에 경건한 자세로 묵념을 올렸다.

엄청난 모기떼가 달라 들어 손과 얼굴 등 노출된 피부들이 온통 울퉁불퉁, 쫓기듯 내려와 차에 올랐다. 모두가 부스럭거리며 긁어대기 바쁘다. 아마도 웃음 지으며 비문을 읽은 것을 괘씸히 여긴 장수산 지사의 호령인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차는 마유로를 따라 되돌아와 군자로와의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받았다. 월곶마을 방향이다.

월곶마을을 지나 상곡 교차로에서 또 한 번 좌회전을 했다. 옥구공원을 향해 달리는 중이다.

그곳이 이날 마지막 방문지다. 지난해 8월 20일 제막된 ‘시흥시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보기 위함이다.

일제강점기 소금 생산 기원을 위한 신사참배단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옥구공원의 ‘시흥 평화의 소녀상’은 칠십 여 년 전 참혹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되었던 어린 소녀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시민들의 뜻이 모여 건립됐다. 시민들의 모바일 투표에 의해 옥구공원으로 장소가 선정됐다.

‘시흥시 평화의 소녀상’은 시민 1538명과 100여 곳의 단체가 6046만7312원을 모금해 건립된 시민들의 마음이 가득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광복 72주년을 맞은 이날 소녀상을 찾은 시민들은 없었다.

‘비 탓일까?’ 쓸쓸히 비를 맞으며 슬픔 가득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앉아있는 소녀상은 빗물이 눈물이 돼 한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없이 눈물만…. 누가 있어 눈물을 훔쳐줄까!’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모두가 같은 마음인 듯 서로를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저들은 아직도 뉘우치지 않고 있는데!

긴 세월에 하나둘 소녀들은 나비가 되어 하늘나라로 떠나가는데!

‘헌법도 무시한 채 건국일을 두고 다투는 학자들이가득하고, 군사독재를 미화하는 극우파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우리의 영토를 전쟁터로 만들려는 몰지각한 우방의 지도자도 건재한데!

새로운 정부는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채운 채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다음해에는 시흥시에서도 광복절 기념행사가 펼쳐져 독립투사들과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넋이라도 돌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