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코로나 이후 예술계의 새로운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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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코로나 이후 예술계의 새로운 모색
  • 시흥시민신문
  • 승인 2022.02.19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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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은 파괴로부터 시작된다..

니체-네이버 지식백과  
니체-네이버 지식백과  

예술사의 한 시대를 구분하는 결정적 요소 중 하나는 당대의 가치관이나 상식의 벽을 깨는 것이다.
철학자들의 예수라 불리었던 스피노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당대의 상식을 깨뜨렸고, 근대 철학자 니체는 ‘망치를 든 철학자’를 자처하며 신의 죽음을 선언하였다.
검은 피부의 마이클 잭슨이 80년대 초반에 팝의 황제가 된 것은 포스트 모던 시대의 대중문화예술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꼽는다. 재즈나 리듬 앤 브루스, 흑인영가 등을 기반으로 했던 흑인들의 음악에서 백인들의 컨트리나 락앤롤 음악으로 세계적인 선풍을 주도한 것은 경악이란 단어로도 부족했다.

마이클 잭슨이 통념을 부수고 세계 팝의 황제가 된 배경에는 질 들뢰즈의 탈중심주의에 기반한다고 생각한다. 들뢰즈는 그의 저서 <천 개의 고원>에서 “모든 인간은 다 각각의 고원이다.”라고 설파했다. 가장 높은 것,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하나가 아니고 모두가 중심이라는 사상으로서 탈 중심이란 것이다. 
신중심주의에서 인간 중심으로의 변화, 중앙중심에서 변방으로의 변화. 이를 계기로 다원주의적 관점의 지평이 확장되었다. 그렇다. 철학자와 사상가는 제시하고, 예술가는 이끌며, 일반인은 변화한다. 철학자들을 거론한 것은 이들이 관점을 바꿔 새로운 세계로 나아 가는 길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마이클 잭슨-네이버 지식백과
마이클 잭슨-네이버 지식백과

위대한 예술가들은 자신이 화가나 조각가로 불리는 것보다 철학자로 불리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야수파의 거장 모리스 드 블라맹코나 피카소가 그의 천재성을 질투했다는 조각가 알프레도 자코메티가 그런 경우다. 내가 무엇을 누구보다 뛰어나게 잘한다는 것을 알리기보다 나는 이것을 전혀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거나 해체하고 재결합을 시도하는 것을 창작의 진정함, 크리에이티브의 출발점으로 생각한 것이다. 예술인들은 이러한 것들을 잘 이해하는 듯하다.

예술인이 다른 예술인을 경배하는 일은 드문 일이다. 그들이야말로 위계를 거부한다. 조직문화를 따르는 것에 주춤하며 스스로 파편화한다. 다만 예술가들이 이런 것을 이해하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새로운 것도 아니고 혁신적이지도 않은 예술, 진부하다 못해 답습하고 베껴 낸 듯한 작업은 대중의 외면을 받을 것이다. 아무런 감흥도 없이 생산된 작품처럼 한강에 모래알 하나 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관람자의 시선을 붙들어 매고 관객의 오감에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 예술가들의 꿈이 아닐까.
예술인들은 이제 니체의 말처럼 망치를 들고 기존의 낡은 방식을 과감히 깨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다른 작가와 차별화가 될 것이고 평론가들과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인식 제고

예술이라는 것이 한 섹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나무뿌리나 가지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정서적 또는 심미적으로 위로와 공감, 자부심을 주며 더 나가 세러피(치료) 개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라는 작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당연히 팔지도 않는단다.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런데 왜 3조 원일까를 생각해 보자. 아니 그냥 계산해보자. 루브르 박물관의 한해 입장료 곱하기 수십 년 수백 년 이런 게 아니다. 예술이 그렇게 수학적으로 단순히 계산해서 값이 매겨지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모나리자의 그림과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어떤 콘텐츠를 기반으로 전시 출판하고, 그걸로 학술대회를 하고, 기자의 기사나 언론과 뉴스 또는 학교 등에서 다루고 해서 확대, 재생산되고 파생되는 총량의 합이라 생각할 수 있다. 평생 동안 대대로 우려먹을 수 있는 게 문화예술 아닌가. 그저 부럽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다른 건 다되어도 문화예술에서 꿀리니까 페기 구겐하임이 유럽의 미술품을 다 사들이고 팝아트나 정크아트, 그라피티 같은 낙서예술로 승부를 펼치지 않았나. 물론 필자는 앤디 워홀이나 장 미쉘 바스키아의 천재성은 인정한다. 

웨민준-네이버블로그-heather
웨민준-네이버블로그-heather

중국도 사회체제나 근, 현대미술에서 콤플렉스가 있으니 장샤오강이나 웨민쥔, 쩡판즈 같은 작가들을 밀고 키운다. 세계미술시장의 경매 점유율을 보면 미국이 27%인데 비해 중국은 34%를 차지한단다. 키우고 사주고 밀어준다. 그러니 안될 리가 있겠는가. 중국미술품이 한해 20조 원이라는데 국내 미술시장의 거래 규모는 약 5천억이란다. 문화예술, 잘 가꾸면 국가적으로도 크게 남는 장사다.
 

문화예술에 대한 투자는 개인과 공동체의 회복 탄력성을 높이기 위한 투자라는 정부와 지자체의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문화예술은 인간의 실존적인 가치를 드높이는, 어떤 가치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설 중에서도 자아실현의 욕구로 가장 상위개념에 해당한다. 예술인들이 불쌍하니까 도와주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공적 가치를 수행하는 자원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코로나로 팬데믹 시대다. 전대미문의 사태다. 발병 초기만 해도 여타 인플루엔자처럼 감기의 한 종류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결국 전 세계로 급속히 번져나가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4세기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1/3이 사망한 일이나 산업혁명의 공통점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감염병에 대처하는 개인과 국가들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허둥대는 것들을 보면서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선진국들에 대한 신화나 환상이 깨졌다. 선진국을 배워야 한다는 선진국 신화, 세계적인 도시화에 대한 신화, 그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별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들을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텅 빈 객석-네이버 블로그-와와의 자유이야기
텅 빈 객석-네이버 블로그-와와의 자유이야기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많이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코로나 이후다. 언제 다시 모여 앉아 공연을 즐기고 전시장에 마음대로 가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통념과 상식을 버리고 예술의 존재 방식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해 보자. 
문화예술의 기본적인 3가지 가치. 이를테면 자율성이라든지 다양성, 창의성 같은 가치에 어떤 절대성을 부여하지 말고, 다양성 같은 경우에는 공동체 가치나 공동선을 추구하고, 자율성이라면 의식문화나 권리 같은 것, 표현문화의 정수에서 나오는 창의성, 이런 것들을 잘 살펴서 관성에 이끌려서 타성적으로 하지 않고 혁신적으로 바꿔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시도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로 온라인/비대면 콘텐츠가 중요한 축으로 등장하고, 국제적 예술교류, 대규모 국제예술행사, 국제 투어 등이 감소했으며, 소규모 관객 대상, 로컬 단위의 프로젝트는 증가했다. 실내공간도 일반적으로 띄어 앉기에서 계단형태의 좌석이 나타나고, 공간 구분용 파티션과 줌 방식의 집체교육도 보편화 되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공간이 등장하고, 줌과 같은 매체적 실험이 가동되어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정착되어 가고 있다.

반면 전통적 예술인이나 미학자들 중에는 공연의 온라인화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비대면으로 영상을 찍어서 송출하는 작업이 어떻게 예술이고 공연이냐, 결국은 영상작업 아니냐며 공연의 현장성, 실시간이라는 특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외출 자체가 공연의 시작이며 현장의 공기와 열기가 주는 흥분감은 현장공연의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의 냉혹한 현실은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것을. 이왕 맞닥뜨린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재정립하여 예술생태계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유튜브와 경쟁하는 시대다. 실시간으로 방탄소년단이나 파바로티, 조수미 같은 당대 최고 뮤지션들의 공연을 영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온라인이라는 출구는 찾았으나 아직도 예술계는 불안하기만 하다. 다른 방식으로 만들 수 있을까. 만들면 과연 와서 봐줄까?

 사진-Sm엔터테이먼트 제공
 사진-Sm엔터테이먼트 제공

지역에 답이 있다.

공연장이나 전시장에 못 가게 되고, 가더라도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는 이런 과정에서 지역문화의 관심이 재조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글로벌을 염두에 두고 로컬화를 고민해야 할 때다. 
4차 산업혁명 이야기가 2016년도부터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AI,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로봇기술 등 이런 것들이 미래의 먹거리라는 생각으로 준비하고 투자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예상보다 훨씬 앞당겨졌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상공간이나 원격기술, 이러한 것들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학교나 사업장에서는 긴박한 상황이 되니 어쩔 수 없이 갑자기 도입해서 배우고, 실전에 투입해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계는 그런 쪽으로 제대로 준비가 되었나. 일부 국립 전시나 공연은 이미 시작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의 예술계는 허둥대고 있는 느낌이다. 더구나 예술을 생업으로 하는 개인들은 언감생심이다. 물론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은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정부와 지자체가 머리를 맞대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지역을 창작의 대상으로

보도자료_제16회 시흥갯골축제 메인포스터
보도자료_제16회 시흥갯골축제 메인포스터
 

최소단위로서 집과 지역의 재발견으로 관객, 청중, 소비자가 생겨나게 하고, 그들이 문화예술과 만날 수 있도록 지역 특성에 맞게 본격적인 투자와 실험이 이뤄져야 할 시점이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와 지방의 협치 체계가 필요하다. 지역의 브랜드나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내러티브 같은 점들이 전국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 지역과 관련된 정책을 생각해 보면 지역의 자산, 자원을 가지고 규모와 범위를 제한하지 말고 예술의 실험 또는 기획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시점이며, 언콘택트에서는 어느 정도 적정한 콘택트를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할 때다.

 예술지원정책으로

전업 예술인 우대정책.
기본 소득 제도.
예술인 보험.
작품의 공공매입 확대.
대관료 면제 및 감면.
역량 강화를 위한 훈련 및 교육.


비대면 콘텐츠 활성화 지원책으로

공간 및 시설지원.
장비 지원.
콘텐츠 제작을 위한 교육지원.
콘텐츠 홍보 및 기부, 후원 등의 지원.
제작인력 지원.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정책이 실행되려면 지자체의 인식이 선행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관의 예술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는 대한민국을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전후 독일의 공예학교 바우하우스를 보라. 정부의 체계적인 정책지원으로 기술과 예술을 접목해서 현대 디자인의 가장 선두에 있는 국가로 성장하였다. 자동차, 아파트, 가구, 의자, 와인 따개, 안경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영역이 거의 없을 정도다.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를 교장으로 세우고 칸딘스키, 이텐, 모흘리 나기 같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모아 실용적이고 단순하며 새로운 예술성이 결합된 창조적인 디자인 개발에 총력을 기울인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우하우스-줌 이미지
바우하우스-줌 이미지

사진과 평면과 건축의 융합, 문학과 연극과 국악의 이종결합, 예술과 기술의 조화와 공존 등 작지만 새로운 생각은 큰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정부의 예술계를 바라보는 관점, 예술생태계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기획과 실행력은 우리 예술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렵고 고단한 시기다. 어려움이 예술계뿐만 아니라서 위안이 된다며 씁쓸히 말하는 이도 있다. 어찌 보면 어렵지 않은 때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려움을 뚫고 앞으로 달려나가야 한다. 바람이라는 부정성이 있어야 바람개비가 돌아가듯 멈춰진 예술계에도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오길 고대한다. 

 

김성덕 칼럼니스트
김성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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