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 근대사를 엿볼 수 있는 ‘시흥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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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 근대사를 엿볼 수 있는 ‘시흥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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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5.22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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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갯골생태공원에는 시흥의 근대사를 엿볼 수 있는 명소가 있다. 바로 염전이다. 1934년 일본인에 의해 소래염전이 축조된 후 1937년 수인선 협궤열차 부설, 1963년 대한염전주식회사 설립, 1971년 대한염업 민영화 그리고 1992년 대한염업이 성담으로 상호가 변경됐지만 기계염 등장과 가격경쟁력 하락 등으로 1996731일 소래염전은 폐업을 하게 된다. 현재는 갯골생태공원의 일부로 관광과 체험용으로 일부 염전과 소금창고가 남아있다.

전성기 때는 200만 평에 이르는 우리나라 천일염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유명했던 시흥염전은 지질학적으로 점토가 40~50%, 사토가 50~60%비율로 염전바닥을 다지는데 유리한 토질을 갖고 있다.

소금생산은 3월부터 20월까지 이뤄지며 5월말에서 6월초에 생산된 소금이 가장 좋은 소금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소금 중 먹는 소금은 3%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는 화학제품으로 Nacl기호를 가진 화학제품을 먹고 있다.

지난 12일 그동안 소래염전을 운영했던 성담은 경기문화재단, 시흥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시흥에코뮤지엄연구회 등과 함께 이곳에서 염부생활을 했던 옛 염부 20여명을 초청해 소금제행사를 진행했다. 행사는 시흥시립전통예술단이 염전을 가로지르는 길놀이를 시작으로 관계자들의 축사와 염부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막이 올랐다. 여느 행사와는 다르게 옛 염부들이 단상에 자리 잡고 앉아 그동안의 노고에 존경을 받는 형식을 갖추었다.

이어 매년 첫 소금을 채취하는 시기에 풍요와 건강을 기원하며 지냈던 소금제 고사를 지냈다. 소래염전 시절 당시 증산기원제라고 불리었던 소금제는 염업의 한 문화로 복원돼 전해지게 됐다. 20186월 복원해 재연을 시작한 시흥염전 소금제는 하나의 문화로 이어가게 된다.

생태와 역사, 예술이 어우러진 '지붕 없는 박물관'인 에코뮤지엄으로 만들기 위해 시흥시와 경기문화재단과 시흥에코뮤지엄연구회 등의 노력이 얻은 결실이다. 염부들의 작은 행사가 아닌 경기만 에코뮤지엄을 대표하는 시흥시의 봄 축제로 시흥염전 소금제가 자리매김할 수 있을 전망이다. 경기만 에코뮤지엄 사업은 경기만에 산재한 역사, 문화, 생태, 생활문화 자원 등 지역의 고유한 문화자원을 주민 스스로 보전하고 활용하여 지역의 문화적 가치 제고를 통한 지역 자긍심 고취 및 지역 문화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사업이다.

소금제를 위해 시흥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시흥에코뮤지엄연구회 등은 옛 염부 찾기 운동에 나섰다. 지속위 등에 따르면 염부를 찾는다, 정보제공자에게는 소정의 선물을 증정한다는 홍보현수막을 통해 50여명의 염부가 연락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염부, 소금밭에 돌아오다라는 기록집을 발간했다.

작년 행사에는 40여명이 참여했지만 올해 행사에는 20여명의 염부가 직접 참여했다. 고사의 축문도 염부가 직접 낭독했다.

당시 염업을 운영했던 성담의 정경한 대표는 축사를 통해 소래염전의 고유문화를 계승할 수 있어 기브다성담의 모태였던 대한염업 시절 염부들의 정성어린 피땀과 노력에 감사하다고 전했다. 정 대표는 시흥의 중요 유산인 소래염전의 자긍심을 되새기고 미래를 꿈꾸는 향토기업으로 역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소금제에 참여한 염부 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달월낚시터를 위탁운영하고 있는 윤기억씨. 윤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염전에서 임시작업수로 시작해 원염부를 거쳐 부반장까지 1983년까지 10년 동안 일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도 염전을 다니다가 2010년 돌아가셨다고 한다. 윤기억씨는 당시 기억을 더듬으며 염전 일을 하면서 농사도 지었는데 염전 식구끼리 모내기도 해주고 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특히 120kg의 소금을 메고 다니는 목도를 잘했다고 했다. 그는 소금더미에 돼지고기를 보관했다가 소금삽을 프라이팬 삼아 고기를 구어 먹던 맛이 그립다고 회고 했다.

또 다른 부반장 출신의 추봉호씨. 방산동에서 태어난 그는 1975년부터 염전 일을 시작해 군대에 다녀온 후 다시 원염부로 일했다고 한다. 중동 건설바람이 불 때는 염부 일을 하며 다진 체력을 바탕으로 어린나이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년 동안 돈을 벌어 방산동에 땅과 소를 샀다고 한다. 다시 돌아온 그는 1986년까지 염전 일을 했다. 이후 건축 일을 하고 있다.

4월초까지 소금 꽂치 적게 피어 설탕처럼 입자가 작고 쓴 죽소금이 나오고, 4월 보름부터 5월말까지 아카시아 꽃이 필 무렵에 송화가루가 노랗게 내려 앉으면 소금이 무한정 나올 때라고 했다. 이 때 소금이 네모 반듯하고 서글서글하게 제일 좋아 술 안주로 제격이었다고 했다.

염부들은 구정(설날)이 지나 모집을 해서 성수기에 일을 시키고 10월말까지 일을 시킨다고 했다. 퇴직금도 없다. 출퇴근 시간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 새벽에 염전에 나왔다. 염전에 나오면 소금을 걷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결정지 4단계, 느테 4단계, 난치 5단계의 염판을 닦아 낸다.

소금제를 총괄 기획한 강석환 시흥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국장은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높은 시흥 갯골의 중요성을 시흥 시민은 물론 국민들에게 알리고 이런 사업의 결과가 소금창고 등록문화재 지정의 발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흥시 관계자는 경기만 에코뮤지엄사업을 통해 시흥의 명맥이 끊겨 사라진 가치 있는 문화자원을 복원하고 재연하여 시흥의 대표 콘텐츠이자 경기만 에코뮤지엄의 대표 콘텐츠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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