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덕의 안경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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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덕의 안경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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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2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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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사발이 첨단산업이라고?

고려시대에는 청자를 굽는 산업이 첨단 산업이었다.

11-12세기에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송나라와 베트남 외에는 없었다.

비슷한 시기의 유럽도 도자기 생산기술이 없었다.

세계3대 도자기중 하나인 독일의 마이센가마에서도 

1709년에야 백색자기를 굽는 기술에 성공했다.

도자기의 역사가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는 

B.C 8000년경 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토기에 지나지 않는다.

고려는 송나라의 도자기술을 전수받아 

송나라를 능가하는 비취색의 청자와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상감청자와 순수백자를 탄생시켰다.

송나라 왕릉에서 고려청자가 출토되었다는 것은 

고려의 도자기술이 송나라의 기술을 뛰어 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왕의 무덤에 같이 묻을 물품목록에 허접한 

물건을 포함시키지는 않았을 테니까.

일본의 조선침략은 표면적으로는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의 땅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를 내세웠지만

속셈은 조선의 첨단기술인 세라믹 기술을 차지하기 위한 

도자기 전쟁이었다.

당시의 도자기는 세계무역의 가장 핫한 아이템이었다.

질 좋은 차 주전자나 찻사발은 

일본영주의 성채 하나와 맞바꿀 수 있었다.

믿기 힘든 일 같지만 이 무렵의 네덜란드는 튤립 사재기가

로또 열풍보다 더 심했다.

가장 귀한 황제튤립은 암스테르담의 집 한 채 값이었다.

거품경제를 의미하는 튤립파동은  이때 생겨난 말이다.

동양의 차 문화를 유럽인 들이 받아들인 것은 

15세기 후반 무역이 활발하던 “대항해 시대”였다.

유럽인들이 먼 나라 동양의 차를 즐긴다는 것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서양인들에게 차는 미지의 음료이며 

신비로운 감로수와 같은 것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자기의 값어치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의 일본인의 밥그릇은 대나무 통 이나 넓은 잎사귀 따위였다.

임란중의 조선의 부뚜막은 막사발 천국이었다.

민초들조차 예술품들을 생활그릇으로 사용할 정도였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눈이 튀어 나올 일이었을 것이다.

이삼평은 임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대표적인 도공이다.

그와 같은 도공들은 사무라이같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도자기술을 발전시켰다.

유럽의 판로를 개척한 일본인들은 

조선의 기술자들을 이용하여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다.

북규슈에 있는 이삼평의 아리타자기(이마리자기)는

1650년대부터 유럽과 동남아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한해의 수량이 수백만점에 이를 때도 있었다.

이삼평은 “아라타의 도조”이자 일본 요업계의 은인이 되었다.

도자의 신으로 추앙되며 그를 끌고간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동등하게 신사에 모셔졌다.

임란이후조선의 도자는 쇠퇴의 길을 걷고 사발의 존재를 잊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그 사발을 막사발이라 불렀다.

광복이 되고 한국전쟁이 막을 내리자 산업 아이템을 찾던 중

일본에서 조선의 찻사발이 귀한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고

한국의 도공들이 화분을 생산하던 것을 접고

막사발 재현을 위해 애쓴 끝에 복원에 성공한다.

첨단 기술!

빼앗기지 말아야한다.

굳건히 지키고 다듬어서 다음세대에 물려 주어야한다.

중국에서 한국의 반도체연구원들에게 엄청난 조건을 제시하며

첨단산업 기술자들을 빼내가고 있다.

정부와 기업에서 신중한 대응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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