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강 조기찬의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살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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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강 조기찬의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살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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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2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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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안양

1. 그날의 안양

지금이야 전국 어느 곳의 어떤 도로라도 잘 포장되어 있고 저 시골구석의 차량은 물론이고 리어커도 잘 다니지 않는 길도 모두들 잘 포장이 되어있어 마음만 먹으면 하루종일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돌아 다닐 수 있지만 60년대 말 70년대의 초 우리나라 도로포장 상태는 서울의 사대문 안과 중요한 국도와 간선도로만이 포장 되어있을 정도라서 그밖의 도로는 도로상태가 엉망이어서 차량이 지나가면 맑은 날에는 흙먼지가 날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웅덩이에 고인 물로 지나가는 차량에 의해 흙탕물을 뒤집어 쓰는 것이 예사인 그런 시절이었다.

70년대 초반시절 서울과 수원을 이어 연결하고 서울의 외곽을 형성하며 폭발적인 발전을 앞두고 있던 안양은 아직까지는 시로 승격을 하지는 못했지만 곧 시로 승격이 돼야 할 정도로 높은 인구 증가 의 집중력을 보이고 있었지만 도로사정은 엉망으로 안양역전 앞을 통과하는 1번선 국도만이 왕복 2차선으로 포장 되어있는 상태로 만약에 시로 승격을 한다 하더라도 도시기반시설이 취약한 입장으로 도시와 농촌이 혼재하는 그런 상태였다.

안양읍은 서울에서 부산과 목포를 목적지로 출발하는 급행열차마저도 영등포에서 정차한 후 이곳 안양을 건너뛰어 수원역에서야 정차할 정도로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아직은 크게 발전하지 못한 미미한 존재의 읍이었다.

그러나 채소농사를 주로하는 서울시 외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안양의 토질은 포도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모래진흙이었기 때문에 포도가 많이 재배되어 포도밭이 많았다. 

그래서 이곳에서 생산된 포도로 포도주가 생산되었는데 TV가 많이 보급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라디오를 통하여 선전되는 안양포도주의 성가는 드높았지만 아직은 자연식이니 웰빙이니해서 건강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쏘세지나 햄 등의 인스턴트 식품들이 새로운 영양원으로 여겨지는 세월인지라 포도주의 소비가 많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외국산 포도주의 수입이 어려웠기 때문에 포도주를 생산하여 판매를 하였겠지만 외국인을 접대하는 호텔식당이나 일부 양식레스토랑에서 판매되고 있었으며 종교적 행사등에서 사용하는 이외에는 소비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언젠가부터는 우리 귀에서 포도주의 광고 소리가 멀어지고 말았는데 이는 안양에서 포도밭이 없어지고 주택이나 공장들이 확장되는 전조이었던 셈이다.

수리산과 청계천 자락에서 흘러 내리는 맑은 물은 안양천을 형성하였는데 맑은 안양천에서는 쪽대로 고기를 몰아서 잡힌 고기들로 매운탕을 끓였고 여름이면 하동들의 멋진 수영장이 되었으며 저녁이면 수줍은 공장의 처녀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물놀이를 즐기곤하였는데 이를 놓칠새라 짖궂은 총각들은 후렛쉬를 들고 아가씨들의 몸매를 훔쳐보느라 찬이슬을 무릅쓰고 잡초 풀속을 헤메던 그런 시절이었는데 안양의 주접동 건너편에 위치한 동양나일론 뒷 동산에는 진달래는 붉게 타올랐고 평촌동의 들판은 푸르기만하고 맹꽁이,개구리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의 발전은 이곳이라고 그냥 두지않고 서울과 인접해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서울에서 밀려나온 사람들과 공장들을 제일 먼저 받아들였는데 특별한 기술이 필요없는 여성인력을 쓸어담기 좋은 경공업 위주의 공장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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