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강 조기찬의 모악산의 춘정, 마이산의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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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강 조기찬의 모악산의 춘정, 마이산의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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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4.25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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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이 품은 뜻

지금은 잊혀지고 말았지만 우리들의 어린시절에 정오가 되면 소방서에서 알리던 사이렌소리인 일명 '오정포'도 잊혀진 지금 옛날과 달리 추억도 낭만도 없이 바쁘기만하여 악악 소리만을 지르며 속도전만 일삼는 오늘날에 와서는 이러한 말들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져 이제는 어디에서고 들을 수도 없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옛 선인들의 여유가 묻어나는 낭만을 보노라면 왜 이다지도 풍요하고 포근한 줄 모르겠다.
 
군세도 적고 생산물도 적고 유명인도 많지 않아 이름도 없는듯한 산중이고 시골인 진안은 발전이 더딘 대신에 오염되지 않은 환경으로 산수가 수려하고 풍치 또한 아름다워 아직도 옛날의 순수함이 느껴져서 그렇듯 정이 가는 줄도 모른다.
 
진안은 지금이야 내륙지방이고 시골이라 하여도 사통오달되고 막힘이 없어 도청소재지인 전주와는 '모래재' 하나만 넘으면 연결되어 전국 어느 곳이라도 마음대로 오고 가지만 지금부터 400여년전 도성인 한양과는 멀기만하고 교통이 불편하여 산중시골인 이곳과는 교류도 잘 되지 않는 그런 시절에 혁신가라고 불리워져야 마땅할 한 젊은이의 꿈이 좌절된 곳이기도 하다.
 
진안에서 10 여Km 떨어진 상전면 수동리의 '죽도'가 바로 그곳인데 내지안에 무슨 섬이 있으랴만 천반산 줄거리의 아래쪽에 물이 휘감기고 돌아 마치 섬처럼 물에 둘러 쌓여있는 곳을 죽도라 하는데 이곳은 역사적으로 '희대의 반골'이라 하는 '정여립'이라는 사나이가 신분질서와 유교윤리를 앞세워 체제에 순응하는 순한 양만을 요구하고 변함없는 사회구조만을 견지하는 사회제도와 체제가 못마땅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수찬등의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모두를 던져버리고 향리에서 제자들을 양성하고 세속의 일도 일상의 도덕과 윤리를 뛰어넘어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며 당시의 신분질서와는 관계없이 천대받고 짓눌려 사는 하급관리와 천민과 노비들과도 교제를 하며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를 넓히며 '대동계'라는 친목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그 세력이 커지자 주위의 질시와 오해를 받을 수 밖에 없었는데 이를 빌미삼아 기존의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황해감사 한준이 비밀장계를 올리도록하여 체제에 반기를 들고 역모를 하였다는 미명하에 관군의 습격을 받아 싸우던'중 이곳 죽도에서 자살로 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늘상 그렇게 기존체제에 반항하면 그렇듯 좌절과 자멸로 이어지는 겄이겠지만 이 결과로 발생한 사건이 조선시대의 '기축옥사'인데 본래 서인이었던 정여립이 동인들과 교류함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서인들이 붕당을 지어 정여립의 행위를 역모로 몰아가는 한편 동인들을 핍박하고 말살시켰다는 것인데 정치는 언제라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시키고 존속 시키기 위하여 반대세력을 몰아 붙이고 축출하며 희생양들을 만드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해 세습처럼 이어지는 권력투쟁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죽도를 휘감는 물결은 오늘도 여전하고 개울가의 모래사장은 희기만 한데 이곳을 찾는 나그네는 전설만을 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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