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강 조기찬의 모악산의 춘정, 마이산의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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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강 조기찬의 모악산의 춘정, 마이산의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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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4.0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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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에 스러진 꿈

1. 모악산의 기상
2. 금산사에 스러진 꿈
3. 마이산의 풍정
4. 정여립이 품은 뜻

그래서 그런지 일부 종교집단들이 잡다한 문제를 많이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만큼 종교를 갈구하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흡입력이 있는 유명한 명산이기에 이러한 잡음도 많을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특히 이곳 모악산에 입산하여 대원사에서 49일간 수도하다 득도하여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종합한 신흥종교인 '증산교'를 세운 '증산교주인 강일순'이 유명하다.

한말개화기에 나타난 동학,대종교,원불교와 함께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한다는 '후천개벽'을 주장한 그의 증산교의 정신은 대표적인 자생적 종교로 발전하였는데 그의 사후 증산교는 여러 교파로 생성되어 50여개의 증산종파를 파생 시켰으나 보화교와 증산대표회라는 두줄기로 집약되어 탄탄한 교세를 자랑하며 증산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으며 증산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있다.
 
모악산은 호남 제일의 고찰로 불리는 금산사라는 유명한 사찰을 품고있다.

금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17교구본사로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번지에 위치하는데 백제 법왕 원년인 599년에 창건 되었다고 하고 신라 혜공왕 2년(766) 진표율사가 중건 하였다고 하는데 임진왜란에 소실된 것을 인조4년(1626)에 재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곳 금산사의 미륵전은 다른 사찰과는 달리 밖에서 볼때는 3층 법당으로 건축된 것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한층으로 커다란 미륵을 보유하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지닌 미륵전이다.
 
금산사는 990년경 전주에 도읍을 정한 후백제의 견훤이 미륵의 힘을 빌려 국가의 번영과 통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곳에 본거지를 두다시피 했는데 후고구려와 40년간의 세월을 겨루었으나 통일을 성취 못하고 있던 중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집안싸움으로 장남 신검에게 붙잡혀 3개월 동안이나 이곳 금산사의 미륵전에 유폐되었다하여 미륵전이 특히나 유명한데 가까스로 이곳을 탈출하여 이제까지는 적이었던 왕건에게 몸을 의탁하고 자신의 꿈을 꺾고 말았는데 '수신제가후 치국평천하'라는 평범한 진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김제군내의 금산면,금구면 일대를 포함한 모악산 일대의 화강암은 금을 함유하고 있어 자연금이 생산되었는데 이 금이 풍화작용을 거쳐 하류로 운반되어 김제 금구의 강바닥과 논바닥으로 스며들어 사금의 산지가 되었다.

그러므로해서 일제시대에는 사금을 채취하기 위하여 대단위의 금광사업으로 전국이 금광 열풍에 휩쓸린 적도 있고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 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모악산은 기도처로서 여러 종교들을 받아들이고 자생종교를 생산시키기도 했지만 전주를 사이에 둔 그 동쪽에는 진안의 마이산이 있는데 암마이산 아래에 처사 이갑용이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100여개의 돌탑을 쌓으며 중생을 구원하고 인류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에서 쌓아놓은 마이탑이 남아있는데 쌓아놓은 탑이 얼마나 정교한지 아무리 세찬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건재하고 있어 불가사의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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